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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 대장이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뒤 태극기를 펼쳐보이고 있다.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엄홍길 대장(65·엄홍길휴먼재단 상임이사)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산악인이다. 그는 사상 최초로 히말라야 8000 고봉 16좌를 모두 완등한 역사적인 산악인이다.
1988년 해발 8850m의 에베레스트를 시작으로 초오유(8201m), 마칼루(8463m), 브로드피크(8047m), 로체(8516m), 다울라기니(8167m), 마나슬루(8163m), 가셔브룸 1봉(8068m), 가셔브룸 2봉(8035m), 안나푸르나(8091m), 낭가파르밧(8126m), 칸첸중가(8568m), K2(8611m)루보 주식
, 시샤팡마(8027m), 얄룽캉(8505m), 로체샤르(8400m)를 모두 올랐다. 이 같은 업적에 힘입어 엄 대장은 2019년에는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에 선정됐다. 대한체육회는 당시 “그의 도전 정신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희망을 준 점을 높이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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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년 K2 등반 당시의 엄홍길 대장.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태어날 때부터 산과 친숙했던 그는 의외로 ‘물 사람’이기도 하다. 새로운 경험을 해보기 위해 군 생활을 해군에서 한 게 계기가 됐다. 인천 바다에서 군 생활을 한 그는 정원이 13명 안팎인 작은 배를 탔다. 서해에서 바다이야기 릴게임 사이트 추천 및 안내
조업하는 어선들을 검문, 검색하는 게 주 업무였다.
배 타는 것 자체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건 막내였던 그가 배 안에서 생기는 모든 잡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요리였다. 따로 주방장이 없던 작은 배였던지라 요리는 계급이 가장 낮은 사람이 하는 게 관례였다. 삼시세끼 10여 명분의이종복
식사를 준비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엄 대장은 “배를 타지 않을 땐 군 생활이 너무 편했다. 하지만 배만 타면 요리를 해야 했다. ‘맛이 있네 없네’, ‘간이 짜네 마네’하는 타박을 매일 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나마스테” 엄홍길 대장은 요즘은 국내 산을 종부동산투자상담사
종 오른다.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뱃사람 생활이 그리 길진 않았다. 그가 타던 배가 엔진이 불타는 사고가 나면서 폐선이 된 것이다. 할 일 없이 내무반에 주로 머물던 어느 날 벽에 붙어 있던 포스터 한 장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해군 특수전전단(UDT) 모집 포스터였다. 체력에 자신 있던 그는 단번에 지원서를 냈다.
엄격한 신체검사를 통과한 뒤 생도 번호 89번을 배정받았다. 그때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의 훈련이 이어졌다. 엄 대장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내가 왜 지원했을까’라는 후회가 몰아쳤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는 ‘딱 오늘 하루만 더 버티자’는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6개월간의 고된 훈련이 이겨냈다. 처음 150여 명이 시작했으나 마지막까지 훈련을 수료한 사람은 채 3분의1도 되지 않았다.
해군과 UTD에서의 경험이 나중에 그에겐 소중한 자산이 됐다. 엄 대장은 “극한의 훈련을 견디면서 체력과 정신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며 “당시의 경험이 나중에 히말라야 16좌를 오를 수 있는 힘이 됐다. 배에서 요리했던 경험조차도 큰 도움이 됐다”며 웃었다.
2019년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에 선정된 엄홍길 대장이 지난해 스포츠 영웅이 된 하형주(유도)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을 축하해주고 있다. 동아일보 DB
엄 대장은 2007년 로체샤르(8400m)로 16번째 봉우리를 오른 것을 끝으로 더 이상 높은 산에 도전하지 않는다. 이듬해인 2008년부터는 ‘인생의 17좌’를 오르고 있다. 17번째 봉우리는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네팔 곳곳에 학교를 짓는 일이다.
그가 히말라야 16좌를 모두 오르기까지는 꼬박 22년이 걸렸다. 38차례 도전해 16번 성공했고, 그보다 많은 22번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동료와 셰르파 등 10명을 잃었다. 그 역시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나들었다.
마지막 16번째 고봉이었던 로체샤르는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고비였다. 3번 실패했고, 4번째 도전에서야 겨우 성공했다. 등정 직전까지 천하의 엄 대장도 죽음과 실패에 대한 극한의 공포에 시달렸다. 추위에 떨면서 그는 히말라야에 기도를 올렸다. “꼭 성공하게 해주세요, 살아서 돌아가게 해주세요.”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왜 너만 살아서 나가야 하느냐”소리가 들렸다. 그는 “살려주신다면 동료들을 챙기고, 남을 위해서 사는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엄홍길 대장이 시샤팡마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천신만고 끝에 그는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히말라야는 그가 원하는 걸 들어준 것이다. 이제는 그가 갚을 차례였다. 엄대장은 2008년 자신의 이름을 딴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2010년 팡보체에 제1차 휴먼스쿨을 세웠다.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목에 있는 팡보체 휴먼스쿨(해발 4060m)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학교다. 처음 학교를 지으려 할 때는 현지인들조차도 “자동차도 들어갈 수 없는 고지대에 어떻게 학교를 짓느냐”고 손사래를 치기로 했다. 이전에도 세계 여러 구호 단체에서 학교를 지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엄홍길 휴먼재단은 공사 시작 1년만에 4개의 교실과 1개의 강당, 도서관으로 구성된 학교를 완공했다. 엄 대장은 “1986년 처음 에베레스트에 도전했을 때 함께 했던 셰르파가 절벽에서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를 당했다. 팡보체는 그의 고향이었다”며 “언젠간 꼭 빚을 갚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터라 1호 학교를 그곳에 지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네팔 오지 곳곳에 엄 대장의 마음이 실린 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엄 대장이 오른 16개 봉우리에 맞춰 16개 학교를 지으려 했다. 그런데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다. 엄 대장은 “한 학교가 완공될 즈음이면 또 어딘가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분이 나타났다. 그렇게 끊이지 않고 학교를 짓는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2020년 16번째 휴먼스쿨이 딸께셜에 들어서면서 그가 약속했던 16개의 학교가 모두 만들어졌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공사는 계속 이어져 지난해 19번째 학교가 완성됐고, 올해는 20번째 학교 터파기가 시작된다. 엄 대장은 “한창 산을 오를 땐 정상만 바라봤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며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건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네팔에 학교를 보급하는 게 내 운명처럼 돼 버렸다”고 말했다.
산은 오른 뒤 내려가면 되지만 학교는 짓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끊임없는 유지, 보수, 운영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 엄홍길휴먼재단은 네팔 현지에 지부를 두고 원활한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히말라야 곳곳에는 엄홍길 대장이 세운 학교가 들어서고 있다.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더 이상 높은 산은 오르지 않지만 그는 여전히 산과 함께 산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 삼각산 밑에 집이 있는 그는 집 인근의 북한산, 도봉산을 자주 오른다.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그만의 코스를 돌면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대신 몸은 건강해지고, 머리는 맑아진다. 한 달에 한 번은 재단에서 운영하는 정기산행을 한다. 그는 “산에만 가면 좋은 기운과 에너지가 느껴진다. 함께 산에 오르는 사람들도 다들 같은 생각이다. 마음이 넓고,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더할 나위가 없다”라고 말했다.
엄홍길 대장은 탤런트 박상원 씨와는 산으로 맺어진 소중한 관계다. 동아일보 DB
어느덧 60대 중반이지만 그는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인다. 가까이에서 보면 피부가 유난히 맑은 편이다. 이에 대해 그는 “하루에 물을 4~5L 정도 마신다. 땀이 많은 편이라 산행과 각종 운동을 하면서 몸의 노폐물을 많이 빼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수영하는 걸 좋아하고, 물에서 노는 것도 좋아한다. 수영장을 갈 수 없는 때는 사우나를 자주 찾는다. 아침 기상과 함께 푸쉬업을 100개 정도 한 그는 사우나에 가서는 스쾃을 1000개 하면서 온몸의 땀을 뺀다.
음식을 가려먹진 않지만 인스턴트 음식은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엄 대장은 “히말라야를 20여년간 오르면서 가장 많이 먹은 게 라면죽이나 라면밥 등 인스턴트 음식이었다. 피자나 햄버거 등도 거의 먹지 않는다”며 “정성껏 재료를 준비해 만들어 먹는 음식이 가장 좋다. 좋은 사람들과 따뜻한 음식을 먹는 즐거움이 크다”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엄홍길 대장(65·엄홍길휴먼재단 상임이사)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산악인이다. 그는 사상 최초로 히말라야 8000 고봉 16좌를 모두 완등한 역사적인 산악인이다.
1988년 해발 8850m의 에베레스트를 시작으로 초오유(8201m), 마칼루(8463m), 브로드피크(8047m), 로체(8516m), 다울라기니(8167m), 마나슬루(8163m), 가셔브룸 1봉(8068m), 가셔브룸 2봉(8035m), 안나푸르나(8091m), 낭가파르밧(8126m), 칸첸중가(8568m), K2(8611m)루보 주식
, 시샤팡마(8027m), 얄룽캉(8505m), 로체샤르(8400m)를 모두 올랐다. 이 같은 업적에 힘입어 엄 대장은 2019년에는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에 선정됐다. 대한체육회는 당시 “그의 도전 정신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희망을 준 점을 높이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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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부터 산과 친숙했던 그는 의외로 ‘물 사람’이기도 하다. 새로운 경험을 해보기 위해 군 생활을 해군에서 한 게 계기가 됐다. 인천 바다에서 군 생활을 한 그는 정원이 13명 안팎인 작은 배를 탔다. 서해에서 바다이야기 릴게임 사이트 추천 및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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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 엄홍길 대장은 요즘은 국내 산을 종부동산투자상담사
종 오른다.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뱃사람 생활이 그리 길진 않았다. 그가 타던 배가 엔진이 불타는 사고가 나면서 폐선이 된 것이다. 할 일 없이 내무반에 주로 머물던 어느 날 벽에 붙어 있던 포스터 한 장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해군 특수전전단(UDT) 모집 포스터였다. 체력에 자신 있던 그는 단번에 지원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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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과 UTD에서의 경험이 나중에 그에겐 소중한 자산이 됐다. 엄 대장은 “극한의 훈련을 견디면서 체력과 정신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며 “당시의 경험이 나중에 히말라야 16좌를 오를 수 있는 힘이 됐다. 배에서 요리했던 경험조차도 큰 도움이 됐다”며 웃었다.
2019년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에 선정된 엄홍길 대장이 지난해 스포츠 영웅이 된 하형주(유도)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을 축하해주고 있다. 동아일보 DB
엄 대장은 2007년 로체샤르(8400m)로 16번째 봉우리를 오른 것을 끝으로 더 이상 높은 산에 도전하지 않는다. 이듬해인 2008년부터는 ‘인생의 17좌’를 오르고 있다. 17번째 봉우리는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네팔 곳곳에 학교를 짓는 일이다.
그가 히말라야 16좌를 모두 오르기까지는 꼬박 22년이 걸렸다. 38차례 도전해 16번 성공했고, 그보다 많은 22번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동료와 셰르파 등 10명을 잃었다. 그 역시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나들었다.
마지막 16번째 고봉이었던 로체샤르는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고비였다. 3번 실패했고, 4번째 도전에서야 겨우 성공했다. 등정 직전까지 천하의 엄 대장도 죽음과 실패에 대한 극한의 공포에 시달렸다. 추위에 떨면서 그는 히말라야에 기도를 올렸다. “꼭 성공하게 해주세요, 살아서 돌아가게 해주세요.”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왜 너만 살아서 나가야 하느냐”소리가 들렸다. 그는 “살려주신다면 동료들을 챙기고, 남을 위해서 사는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엄홍길 대장이 시샤팡마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천신만고 끝에 그는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히말라야는 그가 원하는 걸 들어준 것이다. 이제는 그가 갚을 차례였다. 엄대장은 2008년 자신의 이름을 딴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2010년 팡보체에 제1차 휴먼스쿨을 세웠다.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목에 있는 팡보체 휴먼스쿨(해발 4060m)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학교다. 처음 학교를 지으려 할 때는 현지인들조차도 “자동차도 들어갈 수 없는 고지대에 어떻게 학교를 짓느냐”고 손사래를 치기로 했다. 이전에도 세계 여러 구호 단체에서 학교를 지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엄홍길 휴먼재단은 공사 시작 1년만에 4개의 교실과 1개의 강당, 도서관으로 구성된 학교를 완공했다. 엄 대장은 “1986년 처음 에베레스트에 도전했을 때 함께 했던 셰르파가 절벽에서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를 당했다. 팡보체는 그의 고향이었다”며 “언젠간 꼭 빚을 갚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터라 1호 학교를 그곳에 지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네팔 오지 곳곳에 엄 대장의 마음이 실린 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엄 대장이 오른 16개 봉우리에 맞춰 16개 학교를 지으려 했다. 그런데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다. 엄 대장은 “한 학교가 완공될 즈음이면 또 어딘가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분이 나타났다. 그렇게 끊이지 않고 학교를 짓는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2020년 16번째 휴먼스쿨이 딸께셜에 들어서면서 그가 약속했던 16개의 학교가 모두 만들어졌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공사는 계속 이어져 지난해 19번째 학교가 완성됐고, 올해는 20번째 학교 터파기가 시작된다. 엄 대장은 “한창 산을 오를 땐 정상만 바라봤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며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건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네팔에 학교를 보급하는 게 내 운명처럼 돼 버렸다”고 말했다.
산은 오른 뒤 내려가면 되지만 학교는 짓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끊임없는 유지, 보수, 운영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 엄홍길휴먼재단은 네팔 현지에 지부를 두고 원활한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히말라야 곳곳에는 엄홍길 대장이 세운 학교가 들어서고 있다.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더 이상 높은 산은 오르지 않지만 그는 여전히 산과 함께 산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 삼각산 밑에 집이 있는 그는 집 인근의 북한산, 도봉산을 자주 오른다.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그만의 코스를 돌면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대신 몸은 건강해지고, 머리는 맑아진다. 한 달에 한 번은 재단에서 운영하는 정기산행을 한다. 그는 “산에만 가면 좋은 기운과 에너지가 느껴진다. 함께 산에 오르는 사람들도 다들 같은 생각이다. 마음이 넓고,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더할 나위가 없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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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60대 중반이지만 그는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인다. 가까이에서 보면 피부가 유난히 맑은 편이다. 이에 대해 그는 “하루에 물을 4~5L 정도 마신다. 땀이 많은 편이라 산행과 각종 운동을 하면서 몸의 노폐물을 많이 빼는 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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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가려먹진 않지만 인스턴트 음식은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엄 대장은 “히말라야를 20여년간 오르면서 가장 많이 먹은 게 라면죽이나 라면밥 등 인스턴트 음식이었다. 피자나 햄버거 등도 거의 먹지 않는다”며 “정성껏 재료를 준비해 만들어 먹는 음식이 가장 좋다. 좋은 사람들과 따뜻한 음식을 먹는 즐거움이 크다”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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