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news.naver.com/mnews/article/036/0000046366?sid=104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으로 애간장이 탄다.”
“제발 살아만 있어라. 연락이라도 자주 닿을 수 있길 바란다.”
2022년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우크라이나로부터 7500여㎞ 떨어진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은 눈물바다가 됐다. 이곳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이주한 고려인(일제강점기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한민족의 후예) 5700여 명이 독자적인 공동체를 구성했는데 이 중 250여 명이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우크라이나에 가족이 있는 고려인들은 교회에 모여 기도하고 텔레비전을 지켜볼 뿐 당장 도울 방법을 찾지 못해 애를 태웠다.
최소 1만5천 명의 고려인이 살아
2014년 온 가족이 광주로 이주한 최비탈리(64)씨는 우크라이나에 사는 손자 걱정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손자 최마르크(13)군은 학업 문제로 가족과 떨어져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 미콜라이우에 18살이 될 때까지 머무를 예정이었다. 미콜라이우는 크림반도에서 주요 전략거점인 오데사로 향하는 길 중간에 있는 도시다.
다행히 3월8일 최마르크군은 다른 고려인들과 함께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사이에 있는 몰도바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는 넘쳐나는 난민들 때문에 대중교통이 아닌 택시를 타고 루마니아로 다시 이동했다. 최비탈리씨는 손자를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당장 수백만원에 이르는 항공료를 마련하기 힘들었다.
남루이자(56)씨도 10살 손녀 남아니따양이 엄마와 헤어진 채 다른 고려인들의 손을 잡고 헝가리로 탈출했지만 “항공료가 없어 오도 가도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피눈물을 흘렸다. 허비올레타(50)씨는 우크라이나 오데사에 살던 여동생(42)으로부터 “남편은 전쟁에 참여했다. 아이 3명(20살·13살·3살)을 데리고 몰도바를 거쳐 루마니아에 도착했지만 옷가방만 챙겨 나와 가진 게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들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크라이나는 한국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러시아를 제외하곤 가장 많은 고려인이 사는 국가다. 적게는 1만5천여 명, 많게는 3만여 명의 고려인이 우크라이나에 사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민족의 집단이주를 연구하는 김재기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옛소련 시절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고려인이 유럽 최대 농업국인 우크라이나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며 “우크라이나 정부에 등록된 고려인은 1만여 명이지만 비자를 갱신하지 않거나 무비자로 이주한 사람도 많다”고 설명했다.
사단법인 ‘고려인마을’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피란민이 된 고려인을 돕기 위해 3월10일부터 고려인 난민 항공권 지원 모금운동을 했다. 많은 시민이 고려인 동포의 고통에 공감했다. 모금운동 시작 일주일 만에 720만원이 모였다. 덕분에 최씨와 남씨는 각각 3월13일과 22일 손주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허씨의 동생 가족은 3월30일 귀국했다. 법무부도 우크라이나 고려인의 귀환을 돕기 위해 입국 절차를 간소화했다.
최씨와 남씨의 손주들의 무사 귀국 소식은 다른 고려인에게도 희망을 줬다. 원래 그들 손주의 귀환을 목표로 모금운동이 시작됐지만, 고려인마을은 고려인 동포의 후원 전화가 이어지며 모금운동 기간을 늘리고 지원 규모를 확대했다. 입국한 고려인이 편히 지낼 수 있도록 고려인마을에 옷, 이불, 쌀 등 생필품과 학용품, 김치, 밥솥을 보낸 시민도 있었다.
100여㎞ 이동하는 데 13일 걸려
2022년 4월20일 현재까지 개인이나 단체가 300여 차례 걸쳐 2억500만원의 후원금을 보내줬다. 이 덕분에 4월21일까지 20차례 걸쳐 루마니아, 폴란드, 독일, 헝가리, 몰도바 등에 있던 우크라이나 고려인 121명이 모국 땅을 밟았고 앞으로 493명이 한국에 입국할 예정이다.
한국에 온 고려인들이 전한 전쟁의 참상은 잔혹했다. 3월30일 귀국한 김엘레나(38)씨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미콜라이우에 사는 김씨는 2021년 9월 경기도 안산에 취업한 남편 이미하일로(41)씨와 떨어져 지냈다. 그런데 전쟁이 이어질수록 폭격 소리가 커졌고 3월8일 이웃집이 무너진 걸 보고 나서 두 자녀와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김씨는 다른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차를 갈아타며 루마니아 국경과 가까운 항구도시 오데사로 향했다. 몰려드는 난민으로 도로는 북새통이었고 차편도 구하기 힘들었다. 100여㎞를 이동하는 데 13일이나 걸렸다. 김씨는 “차에 타고 있을 때 어디서 총알이 날아들지 몰라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만 했다”며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어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김씨와 같은 지역에 살았던 문나탈리아(40)씨도 “러시아군의 폭격이 집중되자 급한 마음에 겨울옷만 간신히 챙겼다. 버스와 택시, 배를 번갈아 타며 부모, 남편과 함께 루마니아로 간신히 탈출했지만 좁은 난민촌에서 식사도 제대로 못한 채 지내야 했다”고 회상했다.
“언제 포탄이 떨어질지 몰라 지하실에서 계속 숨어 지냈다” “최근 아이를 출산했는데 전쟁 스트레스 때문인지 모유가 나오지 않는다. 분유도 구할 길이 없다” “포탄이 떨어지자 아이들을 감싸 안은 채 파편에 맞아 숨진 남성을 봤다” 등 직접 겪은 다양한 참상 이야기가 들려왔다. 남아니따양의 휴대전화에도 무너진 자택 사진이 담겨 있어 가족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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